한 소년이 있었다.
기원전 6500년, 인류에게 있어서 아직 본격적인 문명이 출현하기 이전의 시대에 태어났다. 15살이 되었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친 벼락에 맞아 사경을 헤맸다.
오랜 시간 후에 간신히 깨어났지만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실 우주와 인류의 모든 기록을 담은 초차원의 정보집합체인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에게 선택받은 것이었다.
평소에도 지혜롭다는 평을 받고 있는 소년은 아카식 레코드와 접촉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로 진화했다. 그래서 괴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서 온 세상을 떠돌며 기록을 남기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를 대며 부족에서 나왔다.
출신지인 메소포타미아 + 긴밀하게 교류한 역사가 있는 이집트를 묶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 인더스 평원, 중국 평원, 안데스 연안, 메소아메리카만 연안… 이른바 문명의 요람을 관측했다. 관측한 내용은 아카식 레코드로 넘어가 기록으로 바뀌었고, 소년은 21세기가 될 때까지 지구의 관측을 계속했다.
지금부터 시파르(Sippar)라는 본명 대신 율릭 네이트 오언(Ulric Nate Owen)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
2022년.
미국 워싱턴 D.C.의 어느 한 공원에서 두 명의 사람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 한 명은 위에서 언급한 율릭 네이트 오언 = 시파르이고, 다른 한 명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5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체크메이트.”
“제가 졌습니다.”
“메이스의 현 국장이 이런 곳에서 일반인을 만나도 되는 건가?”
“초대 국장인 당신을 만나는 것도 업무입니다.”
메이스(M.A.C.E.)… 풀이하자면 『여러 가지의 지식을 보존하는 기관(Manifold Acquaintance Conservation Establishment)』 또는 『불가사의한 지식을 보호하는 기관(Mystery Acquaintance Conservation Establishment)』이다.
율릭이 1900년대에 창설한 단체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고,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넘어오는 위험한 지식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관이라 그런지 여러 국가에 지부가 존재하며 범국가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한 까닭에 역대 국장들은 초대 국장인 율릭을 경외시하고 있다.
“업무라고 했으니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해봐.”
“전 세계에서 이상기후 현상과 공간왜곡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월드가 우리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야.”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해서 정보를 확인한 율릭은 디지털 월드… 멀티버스(다중우주)에 해당되며 모든 것이 0과 1의 무수한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고 디지털 몬스터, 약칭 디지몬이 사는 세계를 입에 담았다.
1990년대 중반에 디지털 월드의 신적 존재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리얼 월드(현실 세계)의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연결 매개체인 디지바이스를 가지고 파트너 디지몬과 함께하여 디지털 월드를 구했기에 『선택받은 아이들』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디지털 월드에 위기가 닥치면 다른 아이들을 불러들여 해결하게 했다.
“하지만 두 가지 현상에 휘말린 아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건데.”
“저희가 조사를 해볼까요?”
“아니, 내가 디지털 월드로 직접 가겠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위험하겠지. 하지만 괜한 희생이 생기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
불사의 몸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율릭이 합리적인 말을 하자 현 국장은 우선 한숨을 내쉬다가 동의의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체스보드와 기물을 정리하고 공원 밖에 세워둔 자동차를 탄 율릭과 현 국장은 메이스 미국 지부로 이동했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하층으로 내려가니 비밀 시설을 마주하게 됐다.
율릭은 메이스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디지털 월드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넓은 빈방에 차원 간 관문 역할을 하는 기계를 설치하고, 교류 탐지기와 접합 레이저가 들어 있는 나노 장갑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거미줄처럼 엮어서 허공에 설치했다.
좌표를 입력한 다음에 기계를 작동시키니 원형의 포털이 생기면서 잎이 우거진 푸른 숲을 보여줬다.
“성공한 거 같네.”
“초대 국장님. 지시하신 대로 짐을 모두 꾸렸습니다.”
“고마워.”
“통신이나 귀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는 한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이 담긴 소형 배낭을 등에 멘 율릭은 포털 너머의 디지털 월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디지털 월드에 발을 디디고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함과 동시에 포털이 닫혔다.
기계는 스파크를 일으키더니 이내 대부분 망가져버렸다. 메이스의 현 국장과 요원들은 율릭을 걱정하면서도 문제를 해결하고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디지털 월드.
포털이 닫히고 메이스의 구성원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율릭은 배낭을 벗어서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지퍼를 여니 옷가지와 비상식량, 호신용으로 쓰이게 될 글록 권총 한 자루와 탄창 한 개가 들어있었다. 그 중에서 권총집을 꺼내 허리에 차고 권총과 탄창을 좌우에 끼웠다.
지퍼를 잠근 배낭을 다시 메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던 율릭은 어떠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각각 색이 다른 귀인형 디지몬 셋이 붉은색 줄무늬가 있는 검은색의 파충류형 디지몬을 구타하고 있었다.
[탕-!]
“뭐야?”
“디지몬… 이 아니네?”
“인간인가?”
“그래, 인간이다. 무슨 이유로 저 디지몬을 공격하는 거지?”
“이 녀석이 우리를 먼저 공격해서 반격을 했을 뿐이야.”
“…아무래도 내가 괜히 끼어든 것 같네. 하지만 방아쇠를 당겨버렸으니 돌이킬 수 없게 됐어.”
권총집에서 뽑은 글록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총알을 발사한 율릭은 디지몬 셋에게 질문을 했다. 그들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자 글록 권총을 권총집에 다시 끼워 넣고,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거대한 은제 곡도를 소환하여 비어있는 양손에 쥐었다.
「고부리 스트라이크」
「샤마 해머」
「스노우 고브 볼트」
빨간색 머리카락을 가진 초록색의 고부리몬이 마하의 속도로 불덩어리를 던지고, 연두색 머리카락을 가진 암녹색의 샤마몬(원시고부리몬)이 의식에서 사용하는 몽둥이를 던지고, 회색 모자를 쓴 하늘색의 스노우고부리몬이 돌이 들어있는 눈뭉치를 던졌다.
이에 율릭은 곡도를 세 번 휘둘러 불덩어리와 돌이 들어있는 눈뭉치를 베어 가르고,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몽둥이를 튕겨냈다. 세 종류의 고부리몬이 재공격하기 전에 가까이 접근해 칼날로 샤마몬(원시고부리몬)을 참수했다.
용기가 없는 고부리몬은 몸통과 분리된 샤마몬(원시고부리몬)을 보고 겁에 질려 즉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율릭이 곡도를 변형시켜 상당히 큰 활의 형태로 만들더니 화살을 쏴 고부리몬의 뒤통수를 꿰뚫었다.
벌써 둘이 죽었고 홀로 남은 스노우고부리몬은 뒷걸음질을 쳤다. 물론 율릭은 두 발의 화살을 날려 스노우고부리몬의 양 무릎에 꽂히게 만들었다. 스노우고부리몬이 땅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궁검(弓劍)을 소멸시키고 또 다시 글록 권총을 꺼내 쥐면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근거지는 어디에 있지?”
“동쪽으로 가면 오두막이 한 채 있는데… 거기가 우리의 근거지다.”
“알려줘서 고마워.”
[탕-!]
율릭은 스노우고부리몬의 몸통에 두 발의 총알을, 머리에 한 발의 총알을 박아 넣었다. 스노우고부리몬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꼼꼼히 조사를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 종류의 고부리몬이 디지타마(디지몬알)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던 율릭은 자신을 경계하는 작고 검은 디지몬에게 글록 권총을 겨눴다.
“17발 중에서 4발을 사용했어. 남은 13발로 널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크르릉!”
“하도 맞아서 이성을 날아가 버렸나?”
작고 검은 디지몬… 블랙길몬은 흉포성을 드러내며 율릭에게 달려들었다. 율릭은 침착하게 블랙길몬의 양쪽 허벅지를 향해 두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관통상을 입은 블랙길몬이 땅바닥에 쓰러지자 율릭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팔꿈치와 무릎으로 정수리와 턱을 타격했다.
“총알이 11발 남았네. 비상용 탄창까지 더하면 28발이고.”
“…….”
“아무튼 죽든 살든, 넌 나와 함께 간다(Dead or Alive, You're coming with me).”
물리적 충격을 받아 기절한 블랙길몬에게 아카식 레코드로 습득한 마법을 걸어 관통상을 치료한 율릭은 글록 권총을 권총집에 끼워 넣고 영화 로보캅에 나오는 대사를 모방했다. 깨어날 때 난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묶고, 꼬리를 잡고 질질 끌면서 스노우고부리몬이 말한 오두막을 향해 이동했다.
그 뒤를 어떠한 존재가 지켜보고 있었다. 율릭은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눈치를 채지 못한 건지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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