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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월드.
데몬, 발바몬, 리바이어몬, 베르제브몬, 리리스몬과 그들이 이끌고 온 군단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인 팀 트리니티 세이비어 및 협력자들. 그 와중에 노조무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음이 밝혀졌고, 7대 마왕 측이 강제적으로 물러난 뒤에는 피닉스의 정체가 밝혀졌다.
피닉스는 바로 22년 전, 지드밀레니엄몬과의 싸움에서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타치바나 아스카이기 때문이었다. 지드밀레니엄몬이 자폭하면서 발생한 블랙홀에 뛰어들다시피 한 터라 생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카락 색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는 점만 빼고는 그 당시 그대로이자 레이븐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기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스카… 정말로 너야?”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증명해줄게.”
아스카가 땅바닥에 놓여있는 두 개의 막대기를 집어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왼손으로 네모를 그렸다. 그것은 디지털 월드에 처음 왔을 때, 『반신』 노완동에게 전수받은 두 가지 무공 중 하나인 쌍수호박(雙手互搏)이었다.
개발자인 노완동을 제외하고 이 무공을 익힌 자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이븐은 그 광경을 곁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아스카에 대해 의심할 이유가 없으며 살아서 돌아왔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지금은 알려줄 수가 없어.”
“어째서죠?”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뭐, 일시적으로 방음 처리를 해놓으면 한두 가지는 말할 수 있단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말을 하던 아스카는 손가락을 튕겨서 돔(dome)의 형태를 한 새하얀 공간을 만들어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겠지만, 도청될 가능성은 많이 줄어들었다.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게 되자 아스카는 잭과 노조무를 불러서 자신의 곁에 서도록 했다.
“고모. 이전부터 노조무를 알고 있었나요?”
“응. 엄청난 진통 끝에 출산한 내 아들이거든.”
노조무가 아스카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 설마 했는데, 사실임이 드러나자 모두들 내심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가족 관계를 짚어보자면 타치바나 노조무(橘望)는 아스카의 아들이고, 유키토와 유이에게는 조카가 되며, 진과 준에게는 사촌동생이 된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제 슬슬 해제될 때가 됐군. 질문할 게 있으면 얼른 물어봐.”
“지드밀레니엄몬이 만들어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이후의 일을 들려줘.”
“그건 내일 이야기할 생각인데. 좀 긴데다가 유키토와 유이한테도 알려줘야 하니까.”
“하긴 그러네요.”
“좀 있다가 너희들을 현실 세계<리얼 월드>로 보낼 거야. 동생하고 올케한테 내가 돌아왔다고 전해줘.”
이 대화를 끝으로 새하얀 공간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아스카는 자신이 말한 대로 팀 트리니티 세이비어 전체와 레이븐을 비롯한 협력자들을 한꺼번에 현실 세계<리얼 월드>로 보내버렸다.
빛을 내뿜은 마방진이 본래의 목적을 이룬 것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짧게 숨을 내뱉고는 노조무, 잭과 함께 제피로스-원에 탑승했다. 곧이어 이륙하여 공중에 떠있던 제피로스-원은 차원도약을 실행하여 피닉스로서의 아스카가 본거지로 삼고 있는 차원으로 이동했다.
*
현실 세계.
준, 류이치, 유코, 진과 대부분의 디지몬들은 디지털 월드로 옮겨지기 전에 잠시 머물고 있었던 공원으로 돌아왔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자 팀 트리니티 세이비어 소속의 디지몬들은 세 아이의 크로스로더에 들어갔고, 레이븐을 비롯한 협력자들은 스스로의 힘과 주변의 도움을 통해 인간으로 변신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게.”
“피닉스가 아스카 씨라는 사실을 아신다면 엄청 놀라실 거야.”
“그래도 알릴 건 알려야지. 고모도 당부를 했고.”
“저희도 같이 갈까요?”
“아니야. 차라리 내일 오도록 해.”
“응, 맞아. 혹여 고모가 집으로 오실지도 모르니까.”
진과 준이 차례대로 말을 하자 류이치와 유코는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작별인사를 한 뒤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타치바나 형제의 경우, 『반신』 페라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모습을 한 협력자들과 함께 순식간에 집 거실로 이동하게 됐다.
“어서 오렴.”
“밖에 나갔다 온 사이에 인원이 늘었구나.”
“아빠. 엄마. 할 말이 있어요.”
“말해보렴.”
“…고모가 돌아왔어요.”
운을 띄우는 준과 본론에 들어가는 진의 말에 유키토·유이 부부는 처음에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확신이 안 가서 멍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두 아들의 말을 이해하고는 얼굴에 경악의 빛을 드러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소파에 앉아서 다과를 들고 있었는데,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찻잔을 마룻바닥에 떨어뜨렸다.
“지금 뭐라고 했니?! 누님… 누님께서 살아계신다고-!!!”
“예.”
“피닉스가 바로 아스카 고모였어요.”
“잠시만! 저번에 봤을 때, 피닉스는 진 너하고 비슷한 나이 때인 걸로 아는데?”
“그건 일종의 위장이야. 가면이 박살나면서 준과 비슷한 나이 때인 본모습이 드러났어.”
레이븐의 말에 아직까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유키토와 유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서 타치바나 형제가 노조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끝까지 다 듣던 유키토가 의아한 마음에 질문을 했다.
“노조무가 누님의 아들이라면 그 아버지… 나에게는 매형에 해당되는 사람은 누구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거기다가 누님은 아이를 가지기 힘든 몸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예전에 누님이 병에 걸려서 종합검진을 받았을 때, 나도 같이 있었어. 그런데 의사의 말에 따르면 자궁이 불완전해서 임신이 어렵고, 설령 임신에 성공을 해도 출산이 어렵다고 하더군.”
유키토가 레이븐조차 모르는 아스카의 비밀을 말하자 다른 이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충격을 받으면서도 또 다른 의혹이 일어났다. 그러나 추측만 해봤자 사실을 알기 힘들어서 나중에 아스카와 만날 때 묻기로 하고, 지금은 의인화한 디지몬 일곱과 『반신』 한 명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은 어느새 오전에 도달했다. 디지털 월드의 시간대를 기준으로 오랜만에 집에서 잠을 잔 준은 단정하게 차려입고는 가족, 류이치과 유코, 협력자들과 함께 아스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오늘 올까?”
“올 거라고 믿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 시간을 정해둘 걸 그랬나?”
[그러게. 미처 생각하질 못했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모두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평상복 차림의 아스카와 노조무가 안으로 들어왔다. 피닉스일 때 입었던 올 블랙 패션(All Black Fashion)과는 달라서 조금은 어색한 감이 있었는데, 유키토와 유이는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에 가슴 가득 울컥하고 감동이 올라왔다.
“그 때 만난 이후로 다시 보는구나.”
“누님… 은 여전하시군요. 저희는 늙었는데.”
“늙은 것이 아니라 장성한 거지. 평범한 사람으로서 말이야.”
“그러네요.”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기에는 여기가 좁은 거 같으니 장소를 옮겨야겠어.”
거실로 발을 옮기지 않고 현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아스카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일종의 왜곡 현상이 일어나더니 장소가 집에서 새하얀 공간으로 바뀌었다. 유키토와 유이는 이곳에 처음 오는지라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이 광경을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이곳저곳으로 옮겼다.
곧이어 새하얗기만 한 공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뷔페로 바뀌었고, 두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피닉스의 동료 겸 부하로 차이점이 있다면 잭은 팀 트리니티 세이비어 전체와 협력자들이 알고 있고, 후마는 피닉스를 포함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른다는 것이다.
“너는!”
“검 집어넣어, 레이븐.”
[슉!]
“아스카?!”
“지금은 같은 편이야. 정확히는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면 떠날 수 있지. 어쨌거나 과거의 일로 생겼던 감정은 접어두도록 해.”
후마를 보고 깜짝 놀란 레이븐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칼집에서 두 자루의 검을 뽑으려고 하자 아스카는 단순히 말을 하는 것으로 검을 다시 집어넣게 만들었다. 경악할만한 상황인지라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여 납득시키고는 테이블에 앉으라는 권유를 했다.
알(디지타마)에서 부화하지 않은 디지몬 하나를 제외하고, 크로스로더에서 나온 팀 트리니티 세이비어 소속의 모든 디지몬까지 합쳐서 총 마흔아홉의 인원이 자리를 잡고는 음식을 쟁반에 담아서 가져왔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아스카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줄 거야. 22년 전에 벌어졌던 일이 기원이었지.”
“보여… 준다고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지. 그리고 이 차원과 동화하면 텔레파시를 통해 내 기억을 보여줄 수 있어.”
아스카가 정신을 집중하자 영화관에서 볼법한 거대한 스크린이 나타났고, 오른쪽 검지와 중지를 모아 관자놀이에 갖다 대자 이미지가 떠올라 영상처럼 재생되었다. 맨 처음은 지드밀레니엄몬과 대치하고 있는 장면으로, 아스카와 레이븐, 성인이 된 선택받은 아이들과 파트너 디지몬들, 로얄 나이츠, 3대 천사, 7대 마왕, 올림푸스 12신이 힘을 합쳐서 지드밀레니엄몬을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
“이 때 지드밀레니엄몬이 자폭하면서 블랙홀을 만들어냈지.”
“잘못하면 디지털 월드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아스카 네가 몸을 던져서 이를 막아냈고.”
“그럼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이후를 보도록 할까?”
자신이 겪은 일을 태연하게 말한 아스카는 손짓을 하여 장면을 바꿨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후, 새까맣고 중력이 없는 듯한 공간에 둥둥 떠 있는데 신체 일부가 소멸되었다. 거기다가 그 부위가 서서히 바스러져 가루가 되더니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여러 차원을 여행하면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죽음의 위기를 겪었고, 몇 번은 진짜로 죽었다가 간신히 되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너무나도 좋지 않아서 기사회생은 기대할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본인 역시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처럼 타오르는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지자 모든 힘을 끌어 모아 흐려지는 시야를 간신히 붙잡았다. 정면에는 불사조의 형상을 한 에너지 덩어리가 있었고, 별의별 일을 겪어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던 아스카가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몸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은 터라 눈에 띄지는 않았다.
“저건 뭐죠?”
“나도 몰라. 편의상 피닉스 포스(Phoenix Force)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피닉스 포스… 설마 그 때까지 사용했던 피닉스라는 이름의 유래가 저거였어?!”
“정답.”
피닉스 포스라는 에너지 덩어리와 피닉스라는 코드네임의 관계를 눈치 채고 질문을 하는 레이븐에게 짧고 간결한 대답을 해준 아스카. 어쨌거나 영상 내에서 아스카는 입을 열 힘조차 없어서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는데, 그 과정에서 피닉스 포스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제안의 내용은 이곳에서 벗어나고 소멸되어 가는 육체와 영혼을 복구시켜주는 대신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신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 같은데, 만약 받아들였다가 잘못될 경우엔 자아와 인간성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카는 피닉스 포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체념하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도 내심 한을 품고 있었는데, 일생에 걸쳐 마무리를 짓지 못한 몇 가지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더라도 되살아날 것을 선택했다.
“피닉스를 받아들인 후에 여기로 오게 됐고,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수면에 들었지. 그러다가 대략 8~9년 전에 깨어나게 됐어.”
“노조무를 가졌을 때였나요?”
“맞아. 내 동생에게 들어서 아는 이들이 있겠지만, 모르는 자들도 있을 테니 말하도록 하지. 원래 나는 자궁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임신과 출산이 불가능에 가까워. 하지만 피닉스 덕분에 그 문제가 해결돼서 임신이 가능해졌지. 뭐, 출산은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스러웠지만.”
다음 영상은 편집된 것처럼 흐릿하거나 끊긴 부분이 많았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제3자로 보이는 존재와 결합을 했고, 노조무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배가 눈에 띄게 부르고 출산 시기가 되어 분만을 시작하는데, 아스카 본인의 말대로 고통스러워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힘을 방출했다.
평균 9시간 동안 진통을 겪던 아스카는 간신히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이 아기가 바로 지금의 노조무로, 아스카가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탯줄은 끊어져 있으며 피와 양수로 범벅이 된 신체는 깔끔해져 있었다.
“한 가지 질문할 게 있습니다.”
“말해봐.”
“노조무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내 남편이야. 혹시 몰라서 유전자 검사를 해봤거든.”
“그는 분명…….”
“결혼식 날 습격을 당했는데, 날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지. 그 때, 비가 내렸었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히스테리성 두통을 앓고 있지. 지금까지도 말이야.”
애써 담담하게 말을 하던 아스카는 그 당시의 일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다섯 손가락으로 이마를 눌렀다. 그러자 영상이 일그러지더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가슴에서 대량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고, 아스카는 그를 끌어안고는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모두가 그 영상, 정확히는 아스카의 기억을 보고 가슴이 먹먹할 정도의 슬픔을 느꼈다. 이야기가 중간에 멈출 듯하자 노조무가 엄마의 옷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고, 그제야 감정을 다스린 아스카는 영상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나도 처음에는 경악을 했지. 내 나이를 기준으로 약 88년 전에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노조무가 생긴 거니까.”
“어머니는 알고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런데 말을 안 하더라고. 내 언젠가는 알아내고야 말겠어.”
“저기, 다른 질문을 할게요.”
“유코인가? 말해보렴.”
“지난번의 싸움에서 노조무가 발바몬의 공격을 막아냈는데, 초능력을 사용한 건가요?”
“맞아. 다만 내 고유 능력이 염동력과 텔레파시라면, 노조무의 고유 능력은 방어막 형성이야. 기본적으로는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거지만, 응용을 하면 적을 안전하게 가둘 수 있지.”
아스카는 노조무의 능력을 설명하고는 영상을 넘겨 다음 장면을 보여줬다. 시간이 흘렀는지 갓난아기였던 노조무는 네다섯 살로 보일 만큼 성장했고, 아스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산책로로 바뀐 새하얀 공간을 걸으면서 좌우에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균열이 일어나더니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졌다. 근처까지 다가가 자세히 확인해보니 검은색의 쇠사슬로 보이는 어떠한 것이었다.
“여기는 다른 모든 공간을 초월했으며 또한 연결되어 있는 차원이야. 그래서 별의별 물건이 흘러들어오기도 해. 제피로스-원의 초기 버전인 퀸젯도 그렇게 해서 얻은 거고.”
“저 쇠사슬…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한데.”
“곧 알게 될 겁니다.”
페라리우스의 반응에 아스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영상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트레이드마크인 크로스백을 소환한 아스카가 천리안의 돌, 「팔란티르(Palantir)」를 꺼내더니 여러 개의 마방진으로 감쌌다.
일종의 필터를 만들어서 자신에게 끼칠 악영향을 차단하고는 「팔란티르」를 매개체로 삼아 텔레파시를 응용한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를 사용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왠지 모르게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아스카가 본 것은 검게 물든 수정기둥 내부에 갇혀있으며 온 몸에 사슬이 박혀 포박당한 누군가였다. 종족과 성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되자 더욱더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엄청난 사기(邪氣)가 밀려와 마방진을 침식하고 「팔란티르」에까지 영향을 미치려고 하자 다급히 연결을 끊었다.
“설마… 그럴 리가?!”
“페라리우스?”
“아는 자입니까?”
“지금의 디지털 월드를 구성하는 기반을 마련한 『신』이 창조한 『반신』 중 하나이자 최초(First)이며 잊혀져(Forgotten)버린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고, 수많은 피해 끝에 패배하여 디지털 월드의 대지와 지하 사이의 틈새에 봉인된… 아포칼립스(Aapocalypse)다.”
고대 10투사와 루체몬이 벌인 싸움의 여파로 봉인이 살짝 약해진 틈에 아포칼립스의 영혼 일부가 빠져나와 악행과 벌인 적이 있었다. 물론 가이오몬, 판쟈몬(화이트레오몬), 발키리몬 같은 피해자들이 동지가 되어 로얄 나이츠와 7대 마왕 일부, 여러 디지몬들 및 『반신』 오라클의 협력을 얻은 끝에 쓰러뜨릴 수 있었다.
지금은 역사와 전설 사이에 발을 디디는 중이고, 디지몬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상에 나온 아포칼립스는 오리지널이며 몸에 박힌 쇠사슬과 이곳에 떨어진 쇠사슬은 같은 물건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대부분이 의문을 품는데, 이를 해소할 생각으로 아스카가 입을 열었다.
“연결을 끊자마자 쇠사슬은 검은 화염과 함께 소멸됐고, 직후 「그녀」가 나타났어. 너희들 할머니 말이야.”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아포칼립스가 맞는다고 하더라고. 거기다가 블랙 버틀러가 그의 부하라고 하더군.”
“예?!”
아스카와 노조무, 잭, 후마를 제외한 이들이 뜻밖의 사실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다른 이들이 진정할 수 있게 시간을 준 아스카는 영상을 통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아포칼립스가 블랙 버틀러를 내세워 디지털 월드에 혼란을 일으키고, 그렇게 시선을 끌면서 봉인을 풀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아포칼립스의 계획에 대해 아는 자보다 모르는 자가 더 많다고 하면서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는 말도 했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누군가는 십중팔구 아스카일 것이다. 애초에 아포칼립스를 속박하던 쇠사슬 일부가 여기에 떨어진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런 이유로 망설이고 있는데, 조카인 준도 참여하게 될 거라는 「그녀」의 말에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아무리 내가 피닉스 포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그녀」를 이기는 건 엎지른 물은 도로 담을 수 있는 것과 같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거군.”
“결국 「그녀」의 뜻대로 아포칼립스의 계획을 막기로 했지. 먼저 날 도와줄 동료이자 부하를 얻으라면서 다른 차원으로 보내더군. 강제적으로 말이야. 하하하~”
어린 아들과 헤어져야 했다는 점이 한스러웠는지 웃음에는 약간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후 감정을 다스린 아스카는 두 개의 차원에서 각각 잭과 후마를 만나는 장면을 보여줬다. 그런 뒤에 디지크로스 시스템과 크로스로더를 개발한 존재와 만남을 가졌다.
“그와 협력하게 된 후에는 아포칼립스나 블랙 버틀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특수한 가면을 만들어서 얼굴을 감추고 신체가 바뀐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지. 거기다가 진짜 능력을 숨기고 위장된 능력을 사용했지.”
“금속 및 자기장 조종 말이군요. 사실은 염동력으로 간섭한 겁니까?”
“눈썰미가 좋구나. 금속 조종은 쉬웠는데, 자기장 조종은 꽤 까다로웠지. 그렇다고 염동력을 쓰자니 내 정체가 드러날 것 같아서 고민을 많이 했단다.”
“고생하셨네요.”
“그래. 고생했지.”
준이 위로를 하자 아스카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22년 동안의 일이 축약된 영상이 끝나고 거대한 스크린도 사라지자 모두 모여서 의논을 시작했다. 그 주제는 당연히 아포칼립스 및 블랙 버틀러에 대해서였다.
“그렇다면 7대 마왕은 블랙 버틀러… 아니, 아포칼립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건가요?”
“완전히 조종당하는 건 아니고 일부 가치관이 변질되었다고 봐야해. 오히려 그 편이 의심을 덜 받게 될 테니까.”
“아포칼립스는 디지털 월드의 어둠을 관장했고, 봉인된 이후에도 권능이 완전히 박탈되지는 않았으니 영향을 주는 건 가능하겠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다섯 마왕 중에서 멀쩡한 이는 발바몬이고, 그 다음이 리바이어몬이지. 나머지 셋은 부상 을 입었으니 복귀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 사이에 두 파로 나눠진 로얄 나이츠를 통합시키고 7대 마왕의 변질된 가치관을 부셔야지.”
“이그드라실을 설득하려는 건가?”
“아니, 구출하려는 거야.”
아스카의 말을 듣고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그들은 이내 의미를 깨달았다. 이그드라실이 아포칼립스와 블랙 버틀러에 의해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거고, 여태까지 로얄 나이츠가 받았던 명령은 위조라는 뜻이 된다.
또한 오라클, 노완동, 디지털 월드의 안정을 바라는 자<호메오스타시스> 역시 이그드라실처럼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7대 마왕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그들보다 훨씬 강하고 훨씬 위험한 존재가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통한 신음소리를 냈다.
“일단 나하고 손을 잡고 있는 디지몬들을 부르도록 하지. 그리고 준의 크로스로더에 있는 알(디지타마)을 부화시켜야겠어.”
“도대체 그 알에는 누가 있는 건가요?”
“여기에 있는 모든 디지몬 중에서 그를 아는 건 딱 넷밖에 없지. 특히 레이븐 너는 잠시나마 동행했었고, 전수받은 오의(奧義) 하나를 본인에게 맞게 바꿨잖아.”
“가이오몬을 말하는 거야?!”
“그가 아니면 누구겠어.”
메타 발언을 살짝이나마 하자면 무쌍(無雙)과 무쌍(無雙) Ⅱ의 주인공인 가이오몬의 행방을 알게 되자 당연하게도 아스카를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이번에는 다른 이들의 혼란스러움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가이오몬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이오몬의 육체는 샤우트몬의 고향에 있었는데, 영혼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명계에는 없었나요?”
“플루토몬과 싸울 때, 정체를 드러내면서 피닉스 포스를 통해 증폭시킨 텔레파시로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어.”
“그렇다면 디지털 월드에 있다는 얘기로군요.”
“맞아. 지금까지는 정체를 숨기느냐고 자제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으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력으로 나설 생각이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본격적으로 나서겠다고 천명하자 다른 이들은 안심이 되면서도 왠지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본인도 염두에 두고 있는지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남은 음식들을 소멸시키듯이 치워버렸다.
앞으로의 계획이 결정됐으니 하루 이틀 정도 휴식을 가진 다음에 디지털 월드로 가자는 말을 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의논이 끝나고 나서 팀 트리니티 세이비어 소속 디지몬들을 크로스로더 안으로 옮긴 준, 류이치, 유코는 유키토·유이 부부, 진, 레이븐을 포함한 일곱 디지몬, 『반신』 페라리우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새하얀 공간에 네 명이 남게 되자 아스카는 노조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후마와 잭을 순서대로 바라봤다. 이에 후마는 로얄 나이츠를 마저 관찰하기 위해 디지털 월드로 떠났고, 잭은 가이오몬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장치를 만들고자 자리를 비웠다. 둘만 남게 되자 아스카는 크로스백을 소환하여 어깨에 비스듬히 메었다. 이제부터 피닉스가 아닌 타치바나 아스카로서 활동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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