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스몬의 성채.
실력을 알아보고자 잠시 싸움을 벌인 율릭 + 파트너 디지몬 셋과 리리스몬은 현재 직사각형의 식탁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율릭과 리리스몬은 식용 도구를 사용하고, 블랙길몬은 손톱을 포크처럼 사용하고, 테리어몬은 양쪽 귀를 손처럼 사용하고, 쟈자몬은 부리로 쪼았다.
처음에는 대화 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식사를 마치고 식용 도구를 내려놓은 리리스몬은 싸움 이후에 생긴 의문을 해소하고자 율릭에게 질문을 했다.
“여러 번 결혼을 했고, 그 중에서 진정한 연인은 한 명이라고 했었지?”
“……알고 싶어?”
“당연하지.”
“……내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대답을 듣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겠지. 어쩔 수 없군.”
“사실 우리도 궁금해.”
“괜히 말했나 싶기도 하네.”
율릭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머나먼 과거를 떠올렸다. 아카식 레코드의 관측자가 된지 50년도 채 안 됐을 때, 지금의 튀르키예(터키) 지역에서 처음으로 결혼했다. 30년 동안 부부로서 같이 살다가 아내가 병으로 사망하자 율릭은 장례를 치르고 그리스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다가 잠시 장착하면서 한두 번 정도 결혼을 했다. 그러나 사별이든 이혼이든 배우자와는 필연적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성관계는 가능했으나 자식을 얻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율릭은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받은 대가라고 여기고 있었다.
“한동안… 그러니까 1500년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살다가 진정한 연인을 만나게 됐어.”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 존재들에게 1500년은 한동안을 초월하는 시간이야.”
“좋은 추억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딴죽 걸지 마라.”
“미안.”
“외모는 어땠어?”
“아름답지 않았지만 추하지도 않았어. 다만 선량하고 현명했지.”
지방 영주의 딸인 그녀를 만난 율릭은 그녀의 부모와 진심 어린 논의를 나눈 끝에 결혼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 둘 사이에 자식이 없어서 장인의 조카가 후임 영주가 되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90세 가까이 살면서 그 당시로는 상당히 장수했다.
당연하게도 외양의 변화가 없는 율릭과는 달리 그녀는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혼 또는 별거를 택하지 않았다. 부부가 논의를 하고 율릭은 아들, 손자, 증손자로 위장하여 아내의 곁에 머물렀다. 그녀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는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사용해서 수명을 연장시키려고 했다.
“아내는 내 곁에 머물고 싶었지만 자연의 법칙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래서 전력을 다해 설득했고, 결국 아내의 뜻을 받아들였어.”
“율릭.”
“정성껏 장례식을 치르고 그 당시의 영주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준 다음에 방랑을 계속했어. 그 이후로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은 건 덤이지. 그런데 이때의 인연이 지식 보존 기관인 M.A.C.E.를 창설하는데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
“혼자 살았다는 거야?”
“동거도 안 했으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독신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밝힌 율릭은 식탁 위에 놓여있는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드러내자 파트너 디지몬 셋과 리리스몬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
“베르제브몬을 만나러 가는 게 어때? 다른 마왕들에 비하면 말이 어느 정도는 통할 거야.”
“말로서 안 된다면 물리적인 방법을 써야겠지.”
“그 녀석이라면 물리적인 방법을 원할걸.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
“예.”
“저들을 베르제브몬의 영역으로 안내해라.”
“그리하겠습니다.”
리리스몬은 자신을 보좌하는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고 율릭과 파트너 디지몬 셋을 보면서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디지몬이라면 리리스몬의 외모에 넘어가 유혹당하겠지만 파트너 디지몬 셋은 보호 마법이 유지되고 있는 터라 영향을 받지 않았다.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으로부터 베르제브몬이 오래 머무는 장소를 전해들은 율릭은 「슬링 링」을 소환하여 왼손 검지와 중지에 걸쳐 끼웠다. 왼손을 앞으로 내민 뒤, 오른손을 회전시켜 「게이트 웨이」를 열었다. 율릭, 파트너 디지몬 셋,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은 각각 동맹이며 상관이 되는 리리스몬에게 인사를 하고는 노란색의 엘드리치 라이트를 튀기는 포탈 너머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율릭은 어깨에 메고 있는 소형 배낭에서 나노 장갑을 꺼냈다. 「슬링 링」이 소멸되지 않게 조치를 취한 뒤 손가락에서 빼고 양손에 장갑을 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글록 권총을 분해 후 재조립하여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냈다.
“데리고 왔습니다.”
“베르제브몬을 만나러 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어?”
“모릅니다. 워낙 떠도시는 걸 좋아하는 분이신지라….”
“혹시 베르제브몬의 머리카락이 있어? 한 올만 있어도 돼.”
관리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율릭이 모근에서 발생하는 실 가닥 섬유 형태의 물질을 요구했다. 관리자는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청소하려고 모아둔 베르제브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율릭에게 건네줬다.
머리카락을 받기 전에 「슬링 링」을 왼손 검지와 중지에 걸쳐 끼운 율릭은 노란색 머리카락에 엘드리치 라이트가 깃들게 했다. 뜨개질을 하듯 손을 움직여 베르제브몬의 문장인 폭식의 관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게이트 웨이」로 바꾸었다.
잠시 후 「게이트 웨이」 너머에서 베르제브몬이 검은색 모터사이클, 「베히모스」를 몰고 이곳으로 넘어왔다. 하마터면 「베히모스」와 충돌할 뻔했으나 율릭은 몸을 옆으로 움직여서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했다.
“넌 누구지?”
“율릭 네이트 오언. 아카식 레코드의 관측자이자 M.A.C.E.라는 지식 보존 기관의 초대 국장이며 디지털 월드와 리얼 월드(현실 세계) 양쪽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자다.”
“…위그드라실을 쓰러뜨릴 생각인가?”
“이미 위그드라실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설득이 통할 리가 없지. 싸움은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돼 있어.”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 리리스몬은 율릭을 돕기로 했나?”
“예.”
“실력을 확인한 다음에 결정했겠지. 그럼 나도 몸을 풀 겸해서 한번 싸워볼까?”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워프 진화!]
베르제브몬이 「베히모스」에서 내려서 목을 옆으로 살짝 꺾자 율릭은 D-워치를 조작하여 파트너 디지몬 셋을 궁극체로 진화시켰다.
그런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슬링 링」과 엘드리치 라이트를 이용하는 미스틱 아츠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테리어몬과 쟈자몬은 세인트가르고몬과 메탈릭드라몬은 멀쩡히 진화했는데, 블랙길몬은 카오스듀크몬이 아닌 듀크몬으로 진화해버린 것이었다.
“디지몬에게 정해진 진화 루트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뜻밖인데?”
“왠지 느낌이 이상해.”
“암흑진화(暗黑進化)와는 거리가 머니 광백진화(光白進化)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지.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뭔가 감정이 끓어오르는군!”
다크 에리어에 에너지 방벽이 세워지기 전에 베르제브몬은 로얄 나이츠의 듀크몬과 자주 싸웠었다. 서로를 숙적이자 경쟁자(라이벌)로 여겼는데 에너지 방벽으로 인해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스트레스가 서서히 쌓여갔다. 그러던 중에 블랙길몬이 듀크몬으로 진화하자 전투욕을 느끼고 미소를 섬뜩하게 지었다.
“보호 주문이 아직 남아있으니 중복시키는 것으로 보완해줄게.”
“고마워.”
“준비가 끝났다면 내가 먼저 간다!”
「더블 임팩트」
율릭이 파트너 디지몬 셋에게 미스틱 아츠를 사용하자마자 베르제브몬은 애용하는 두 자루의 산탄총, 「베렌헤나」을 연사했다. 본래라면 파트너 디지몬 셋이 나서야 하지만 이번에는 율릭이 먼저 행동을 취했다. 글록을 뜯어고쳐 새롭게 만들어낸 머스킷 형태의 권총으로, 총구가 3개이며 맨 위의 총열이 개틀링처럼 회전하면서 총알을 발사했다.
[탕! 탕! 탕!]
“재미있는 무기로군. 이름은 지었나?”
“지퍼스 크리퍼스(Jeepers Creepers). 리얼 월드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1938년에 나온 노래를 그대로 따왔어.”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레이저 사벨」
「메가 트위스터」
「파이널 엘리시온」
「지퍼스 크리퍼스」의 총알이 베르제브몬의 필살기를 막아내자 파트너 디지몬 셋이 반격을 개시했다.
먼저 메탈릭드라몬이 꼬리의 레이저를 검으로 고정시켜 고속으로 돌격했다. 베르제브몬이 「베렌헤나」를 X자로 교차하여 베어지는 것을 막아냈다. 이어서 세인트가르고몬이 돌격하더니 베르제브몬의 두 다리를 잡고 돌리다가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듀크몬이 성순(聖盾) 「이지스」에서 모든 것을 정화하는 빔을 발사했다.
베르제브몬은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참으며 힘과 정신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붉은색의 눈은 초록색으로 바뀌고 등에 칠흑의 날개가 4장 돋아났다. 블래스트 모드로 형태를 바꾼 베르제브몬은 오른팔과 일체화한 듯 장착된 「블래스터」에서 에너지탄을 발사했다.
「데스 슬링거」
“윽!”
“내 갈증을 채우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알았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줄게.”
「카오스 플레어」
베르제브몬은 율릭의 말을 듣고 일말의 기대감을 품으며 「블래스터」로 역오망성의 마방진을 그리고 그 중심에서 파괴의 파동을 날렸다. 이에 율릭은 「지퍼스 크리퍼스」의 총구를 세 갈래로 분열시킨 뒤 회전하면서 한 줄기의 레이저 광선을 발사했다.
처음에는 호각이었으나 점점 율릭이 밀리고 있었다. 총을 들고 있는 양팔과 바닥을 밟고 있는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버티는 동안 파트너 디지몬 셋이 나섰다. 율릭을 도우면서 베르제브몬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로얄 세이버」
「자이언트 미사일」
「레이저 캐논」
우선 세인트가르고몬과 메탈릭드라몬이 양 어깨의 포탑에서 발사한 메가톤급의 거대 미사일과 꼬리의 레이저 건에 모아둔 강력한 광선으로 베르제브몬의 「카오스 플레어」를 밀어냈다. 한편 듀크몬은 성창(聖槍) 「그람」을 세게 내찌르는 강력한 일격을 베르제브몬의 배에 날렸다.
율릭에게 집중하느냐고 듀크몬의 필살기를 허용하게 된 베르제브몬은 부상을 입었으나 왼손으로 「그람」을 붙잡았다. 치고 빠지려던 듀크몬은 베르제브몬의 발악에 속으로 난감해했다. 그나마 율릭이 D-워치를 원격조종하여 듀크몬을 블랙길몬으로 퇴화시키고 손을 뻗어 블랙길몬을 자신의 곁으로 이동시킨 것이 다행이었다.
“무리한 거 아니야?”
“좀 무리하긴 했지. 하지만 네가 저 공격에 휘말리면 보호 주문이 깨지면서 부상을 입었을 거야.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내가 힘든 게 나아.”
“율릭.”
“크으…. 내가 다치는 건 상관이 없다는 거로군.”
“죽지만 않으면 되니까.”
「지퍼스 크리퍼스」의 레이저 광선 + 「자이언트 미사일」 + 「레이저 캐논」에 휘말려 죽지는 않았지만 큰 부상을 입은 베르제브몬은 따지듯이 말을 했다. 율릭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다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베르제브몬에게 하이킥을 날렸다. 한 번만 바닥을 구르고 낙법으로 착지하는 순간 율릭이 베르제브몬의 머리에 「지퍼스 크리퍼스」를 바짝 들이댔다.
“블래스트 모드는 막을 수 없었고 운 좋게 공격이 통해지만 X진화(제볼루션)는 감당할 수가 없어. 그러니 여기서 멈춰.”
“거절한다면 날 죽일 거냐?”
“죽이진 않아. 네가 알아서 피하거나 설령 머리에 맞더라도 중요 부위를 비껴간다면 가까스로 생존할 수 있으니까.”
“7대 마왕을 협박하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군.”
“8000년 이상을 살다보니 나름대로 대담해져서 말이야.”
베르제브몬이 일어나서 머리에 갖다 댄 총구를 떼긴 했지만 여전히 「지퍼스 크리퍼스」를 겨누는 율릭.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베르제브몬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베렌헤나」를 회수하여 다리의 총집에 꽂아 넣으며 싸움을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율릭도 「지퍼스 크리퍼스」를 거두고 미스틱 아츠와는 별개의 마법으로 베르제브몬의 상처를 치유했다. 이로서 오늘 싸움이 끝을 맺자 관리자의 안내를 받으며 모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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