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관측자의 이야기 <완결>

관측자의 이야기 <14>

호르스 2025. 3. 27. 17:25

 다크 에리어.
 베르제브몬은 에너지 방벽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안에서 떠돌았다. 그러던 중에 율릭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재료로서 「게이트 웨이」를 만들어 그나마 오래 머무는 장소로 옮겨지게 되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싸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율릭과 파트너 디지몬 셋을 상대했다.
 파트너 디지몬 셋의 협동 공격에 베르제브몬은 블래스트 모드로 형태를 바꿔서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율릭이 직접 나서고, 세인트가르고몬과 메탈릭드라몬이 화력을 강화하고, 듀크몬이 부상을 입혀서 빠르게 제압할 수 있었다. X진화(제볼루션)를 하려고 했으나 율릭이 새로 만든 무기인 「지퍼스 크리퍼스」를 머리에 겨누고 협박하니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다.
 
“상처를 치료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은 동료가 아니지만 확실하게 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뭐, 병 주고 약 주는 건데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나 같으면 그냥 방치했을 거다.”
 
“적이라면 확인사살을 해야지.”
 
 이곳을 관리하는 디지몬에게 안내를 받아 내부로 들어간 주인 베르제브몬과 손님 율릭이 대화를 나눴고 파트너 디지몬인 블랙길몬, 테리어몬, 쟈자몬과 리리스몬의 보좌관인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이 뒤따랐다.
 크고 넓은 원룸에 들어가니 베르제브몬은 허리를 의자에 딱 젖히고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율릭은 관리자가 가져온 의자에 앉았고 파트너 디지몬 셋과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은 바닥에 앉거나 눕거나 똑바로 서 있었다.
 
“단도직입으로 묻겠어. 어떻게 할래?”
 
“내 답은 하나야. 널 도와주지.”
 
“동행할 생각인가 보네.”
 
“알아차렸군. 마침 다크 에리어 일주도 지겨웠거든.”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 이번 일을 리리스몬에게 보고하도록 해.”
 
“그리고 내가 있으니 너는 돌아올 필요가 없다.”
 
 똑같은 반말이지만 율릭은 정중함을 담았고 베르제브몬은 거드름을 드러냈다. 그래서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은 호감과 불쾌라는 상반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율릭이 만들어낸 「게이트 웨이」 너머로 들어갔다. 곧바로 엘드리치 라이트가 사그라지며 「게이트 웨이」도 없어지자 율릭은 베르제브몬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안 쓰는 무기가 있으면 나한테 줄 수 있겠어?”
 
“아마도 있겠지만 어디다 쓸 거지?”
 
“「지퍼스 크리퍼스」를 한 개가 아니라 한 짝으로 바꾸려고.”
 
“그렇군. 어이, 버려진 무기 중 하나를 찾아서 가지고 와라.”
 
 베르제브몬의 명령에 관리자는 자리를 비웠고 율릭은 소형 배낭에서 나노 장갑을 꺼내 양손에 꼈다. 미리 준비를 마치고 조금 기다리니 관리자가 쌍열 산탄총(더블 배럴 샷건)을 닮은 무기를 가지고 왔다. 율릭은 관리자로부터 무기를 건네받자 나노 장갑을 통해 데이터를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또 다른 「지퍼스 크리퍼스」를 만들어냈다.
 
“Beautiful.”
 
“율릭. 다음엔 누굴 만나러 갈 거야?”
 
“루체몬 폴다운 모드, 리바이어몬, 데몬(마왕몬), 벨페몬, 발바몬… 이 중에서 누굴 만날지 궁금해서 그래.”
 
“벨페몬은 자고 있다고 했으니 지금 만나봤자 소용이 없겠군요.”
 
“미리 말해두지만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고집도 세니 말로는 설득하기 어려울 거다.”
 
 블랙길몬, 테리어몬, 쟈자몬이 차례로 말을 하고 베르제브몬이 자기 나름대로 조언을 해 주자 율릭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양손에 쥔 「지퍼스 크리퍼스」를 들어 올렸다. 조언을 받아들이고 피를 보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얼마 안 되어 마법으로 「지퍼스 크리퍼스」를 어딘가로 보내더니 환복까지 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 출발하자.”
 
“괜찮을까?”
 
“잠깐 쉬고 연달아 싸우면 빨리 끝나겠지만 그만큼 너희가 받는 부담이 커져. 차라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부담이 적은 게 나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
 
“그러한 이유로 신세 좀 지겠습니다.”
 
 율릭과 파트너 디지몬 셋의 말을 들은 베르제브몬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허락을 해 주었다. 관리자가 이부자리를 마련하고 밖으로 나가자 한 팀을 이루게 된 율릭, 파트너 디지몬 셋, 베르제브몬은 누워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
 
 다음 날.
 
“율릭. 네가 제일 먼저 일어났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가끔 아침잠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거든.”
 
“위화감이 느껴지는 말을 하는군.”
 
 해가 뜨지만 어둠에 가려져 볼 수가 없는 다크 에리어에서 율릭이 새벽 시간대에 깨어났다. 미지근한 물로 씻고, 마법으로 세탁한 옷을 갈아입고, 언제든지 무기를 소환하여 사용할 수 있게 준비를 마치니 아침이 되었으며 그때 베르제브몬이 깨어났다. 파트너 디지몬 셋은 그 이후 거의 동시에 깨어났다.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다음 목적지를 정하려는데 관리자가 나타나더니 한 장의 편지를 건넸다. 레이디데비몬(레이디데블몬)이 와서 이 편지를 주고 떠났다는 말을 하자 율릭과 파트너 디지몬 셋, 베르제브몬은 내용을 확인했다. 요약하자면 데몬(마왕몬)이나 발바몬은 만나는 게 그나마 낫고, 베르제브몬에게 내 부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경고를 날렸다.
 
“흥. 겨우 그걸로 트집을 잡다니 기가 막히는군.”
 
“리리스몬 입장에서는 화낼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뭐, 좋아. 그나저나 데몬(마왕몬)과 발바몬, 분노냐 탐욕이냐, 그것이 고민이네.”
 
“마법에 관해서는 둘이 엎치락뒤치락하고, 머리 굴리는 건 발바몬이 한 수 위지만, 물리적인 건 데몬(마왕몬)이 한 수 위야.”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어디 한번 운이 이끄는 데로 가볼까?”
 
 율릭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소환 마법을 사용해서 미국 달러를 꺼냈다. 지폐가 아닌 동전이며, 앞면에는 미국 제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올리브·떡갈나무 가지와 횃불이 새겨져 있었다.
 앞면이 나오면 데몬(마왕몬)을 만나고 뒷면이 나오면 발바몬을 만나기로 정하고는 10센트를 위로 던졌다. 허공에서 몇 번 회전하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빙글빙글 돌았다. 가끔 꼿꼿하게 서는 경우가 있지만 이번에는 뒷면을 드러내며 넘어졌다.
 
“……발바몬을 만나러 가자고.”
 
“참고로 내 「베히모스」는 일인용이다.”
 
“걱정하지 마. 방법은 있기 마련이니까.”
 
 동전 던지기로 갈 곳이 정해지자 율릭은 「게이트 웨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발바몬이 손을 썼는지 엘드리치 라이트가 흩날리면서 「게이트 웨이」는 제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율릭과 파트너 디지몬 셋이 베르제브몬을 바라보자 베르제브몬은 모두 다 탑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율릭은 해결책을 떠올렸는지 나노 장갑을 착용하고 데이터를 조작했다. 바퀴가 달린 좌석을 만들어내고 「베히모스」와 연결하니 사이드카(Sidecar)의 완성이었다. 파트너 디지몬 셋을 D-워치에 수납한 율릭이 좌석에 앉자 베르제브몬은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돌렸다.
 
“최대 속도(풀 스로틀)로 간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리고 달려 발바몬의 영역에 도착했다. 신속하면서도 과격한 운전으로 인해 율릭은 사이드카에서 내리자마자 토악질을 해 댔다. D-워치에서 나온 블랙길몬, 테리어몬, 쟈자몬이 율릭의 등을 토닥이며 몸 상태를 안정시키는 데 도와줬다.
 
“액땜했다고 여겨라.”
 
“그래, 따뜻한 위로는 바라지도 않았어.”
 
“좀 쉬었다가 발바몬을 찾으러 갈까?”
 
“이미 와 있으니 그럴 필요 없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검은색의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파트너 디지몬 셋과 베르제브몬을 속박했다. 유일하게 속박당하지 않은 율릭은 멀미 때문에 안색이 좀 안 좋지만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얀 수염과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의 모습을 한 디지몬이 손에 지팡이를 쥐고 얼굴에 황금 가면을 쓰고 옷에 붉은 보석이 박힌 황금 장식을 두르고 황금으로 만든 열 개의 반지와 두 개의 팔찌를 착용한 채 서있었다.
 
“발바몬. 이게 뭐하는 짓이지?”
 
“날 방해하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었을 뿐이다.”
 
“무엇을 원해서 몸소 나섰는지 말해봐.”
 
“이틀 동안 너를 조사해봤다. 네 능력이 나한테 유용할 것 같아 소유하러 왔다.”
 
“격렬하게 거절한다.”
 
「라이팅[明り]」
 
 발바몬의 탐욕을 알아차린 율릭은 다른 차원의, 일정 시간 지속되는 빛의 구체를 생성하는 불의 정령마법을 사용했다. 기본적으로 광량은 등불 정도이며 지속시간은 2~3시간 정도이지만, 주문의 구성을 조작하여 지속시간을 줄이는 대신 광량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조사(照射)를 허용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눈이 먼다는 것을 알아차린 발바몬은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 틈에 율릭은 「지퍼스 크리퍼스」를 소환하고 발바몬의 등 뒤로 이동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이 발사되는 소리에 발바몬은 방어막으로 막으려다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하나가 아닌 다중으로 겹쳐 형성했다.
 
“하나만 했으면 바로 꿰뚫었을 텐데 좀 아쉽게 됐네.”
 
“최대한 멀쩡하게 가지려고 했건만… 하는 수 없군.”
 
「판데모니엄 로스트」
 
“그렇게 나온다면 이렇게 대처하도록 하지.”
 
 다크 에리어에 감도는 사악한 에너지를 모은 발바몬은 일제히 해방하여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버리는 초고열폭파를 발생시켰다. 그것을 본 율릭은 당황하지 않고 미러 디멘션으로 감싸서 발바몬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자신하는 필살기가 허무하게 막히자 발바몬은 기가 막혀 잠시 무방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율릭이 「지퍼스 크리퍼스」에서 총알을 발사하자 즉시 정신을 차리고는 다중 방어막을 형성했다.
 원래라면 방어막에 막혀서 아래로 떨어지겠지만 이번에는 율릭의 두 눈이 빛남과 동시에 총알의 궤도가 휘어졌다. 목표는 발바몬이 아니라 파트너 디지몬 셋과 베르제브몬을 속박하는 마법진이었다. 총알이 명중하면서 마법진은 박살났고 결박에서 풀려난 디지몬들은 발바몬을 노려봤다.
 
“이런 젠장.”
 
“죽어라, 늙은이!”
 
「다크니스 클로」
 
 베르제브몬이 날카로운 손톱을 추켜올리며 달려들자 발바몬은 사정 봐주지 않고 반격하려고 했다. 그때 땅속에서 엘드리치 라이트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쇠사슬이 튀어나오더니 지팡이 「데스 루어」, 양손, 양팔, 양어깨, 양다리, 양발, 허리, 가슴, 목, 여섯 장의 붉은 날개를 휘감아 발바몬을 구속했다.
 뒤에서 율릭이 중지와 약지를 접어 수인을 맺고 「타오 만다라」를 구현하여 쇠사슬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힘을 빼앗는 효과가 있는지 발바몬은 꼼짝도 못했고, 베르제브몬은 상처를 입히려고 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못마땅하긴 하지만 유용한 전력을 손실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잇!”
 
“크아아아앍!!!”
 
“Tais-toi.”
 
 그렇다고 해서 쉽게 용서할 생각은 없는지라 발바몬의 하얗고 긴 수염을 잡고 있는 힘껏 당겼다. 수염이 뽑히면서 턱이 반들반들해진 발바몬은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꽤 시끄러운지 율릭은 프랑스어로 조용히 하라고 말하고는 발바몬의 뒤통수에 날아차기를 먹였다.
 「타오 만다라」와 쇠사슬이 사라져 움직일 수 있게 된 발바몬은 율릭의 공격을 받아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때 베르제브몬이 주먹을 쥐고 발바몬의 턱을 향해 어퍼컷을 날렸다. 아카식 레코드의 관측자와 폭식의 대죄를 담당하는 7대 마왕의 콤보 같은 공격에 발바몬은 의식을 잃고 땅바닥에 나가쓰러졌다.
 
“죽지는 않았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발바몬의 수염 한 올을 나한테 줘.”
 
 베르제브몬은 턱에서 뽑자마자 땅바닥에 버린 길고 하얀 수염을 손톱으로 집어서 율릭에게 건네주었다. 「지퍼스 크리퍼스」를 따로 수납하고 「슬링 링」을 소환한 율릭은 발바몬의 수염 한 올을 매개체로 삼아 보랏빛이 섞인 「게이트 웨이」를 만들어냈다.
 「게이트 웨이」 너머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건축된 성이 보였다. 십중팔구 발바몬의 본거지일 것이다. 베르제브몬이 의식 불명 상태의 발바몬을 어깨에 들쳐 업고, 파트너 디지몬 셋이 궁극체로 진화한 뒤, 율릭과 함께 성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아무도 없게 되면서 제 역할을 마친 「게이트 웨이」는 탐욕의 관을 상징하는 보랏빛이 먼저 사라지고 엘드리치 라이트마저 흩날리면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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